정약용, 그는 누구인가?

정약용의 삶과 학문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마현(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5남 3녀 가운데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1730~1792)으로 압해 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이다. 


정약용은 유형원과 이익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하고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을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1836년(헌종2) 75세의 일기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과 2,7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삶은 대략 학문 수학기, 관직생활, 유배시절, 해배이후 삶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학문수학기는 대과에 합격할 때까지, 관직생활 시기는 28세부터 1800년 정조가 죽고 낙향할 때까지, 유배시절은 포항으로 유배를 1801년부터 해배된 1818년까지의 시기이며, 해배 이후의 삶은 1836년 돌아가실 때까지 저술을 정리하고 마무리한 시기이다.








1. 정약용 선생은 어떻게 성장했는가?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시를 지었는데, 부친인 정재원은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정약용은 10세에 부친에게서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이름: 혜완)와 결혼하여 서울로 올라가 학문에 매진하였다. 부인 홍씨는 각 도의 국방을 책임지던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의 딸로 당대 명망이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서울에서 학문에 열중이던 정약용은 이가환(李家煥), 이벽(李蘗), 이승훈(李承薰)등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이 때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정약용은 20세를 전후 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 대왕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된다. 23세 때 고향 마현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도중 두미협을 지나며 이벽이 들려준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정약용은 28세에 드디어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2. 정약용 선생은 어떻게 관직생활을 했을까?

정약용은 28세 때 벼슬에 나아가서 정조가 인재 선발을 위해 세운 규장각에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30세이던 1791년(정조 15)에 천주교도인 윤지충이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晉山事件, 1791)이 발생한 후로부터 정적들에게 천주교도라고 모함을 받으며 시달리게 되었다. 


정약용은 배다리 설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나서 31세에 부친상으로 여막살이를 하는 중간에 정조로부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계를 명령받는다. 33세에 경기 북부 지역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탐욕에 찬 지방 관리들을 정조에게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했다. 


1795년(정조 15) 4월에 중국 사람이자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周文謨)가 우리 나라 사람으로 변복을 하고 포교를 위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된 이후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 이를 빌미로 채제공(蔡濟恭) 등 남인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세도 가열되었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임명하고,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임명하고, 이승훈을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 보냈다. 사실 이는 정조가 정약용을 위해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자 정치적 공세를 벗어나게 한 것이었다. 


1797년 6월 정약용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정약용은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모두 밝혔다. 이 상소에서 정약용은 한때 서양 학문과 천주교에 경도되었지만 천주교는 버렸다고 하였다. 정약용이 사직상소를 낸 다음 달 정조는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임명했다. 그때 세력을 잡은 반대파에서 참소하고 시샘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정약용을 몇 년 동안 외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한 정조의 의도였다. 곡산 부사로 부임하던 길에 고을 주민들과 함께 관아에 항의하다 도망다니던 이계심(李啓心)을 만났다. 정약용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곡산부사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은 《목민심서》 저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1799년(정조 23) 38세 때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참의에 임명했다.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기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세력의 정치적 공격도 고조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정약용은 1800년(정조 24) 39세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다. 시기와 질시를 받는 상황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정적들의 공격도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정약용을 보호해 줄 사람도 없어지고 정적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낙향해 있던 정약용 선생은 노자의 《도덕경》 중 “머뭇머뭇, 겨울시내를 건너듯[與兮 若冬涉川] 조심조심, 사방을 두려워하듯[猶兮 若畏四隣]”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짓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러나 정적들의 칼날은 피할 수 없었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앙의 전파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적들이 일으킨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정약용은 유배를 가게 된다.

3. 정약용 선생은 유배 시절을 어떻게 겪었는가?


사실 신유옥사는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조정의 주도권을 노론 벽파가 장악한 가운데 발생했다.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기에 나선 것이다. 


신유옥사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한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이제는 거리를 둔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첫 번째 유배지는 경상북도 장기(현 포항)였다. 황사영 백서사건1)으로 서울로 다시 잡혀온 정약용은 그 해 11월 5일에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두 형제는 나주의 율정이란 곳에 있던 주막에서 헤어진 뒤 16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형은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816년에 죽고,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81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약용은 유배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바꾸었다. 정약용은 “이제야 참다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학문과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정조의 인정을 받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죄인으로 유배 온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은 없었다.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대역죄인이라 여겨 모두 접촉을 피했다.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주모만 정약용을 불쌍히 여겨 챙겨주었다. 정약용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 과묵해야,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유배 초기의 혹독한 감시와 압박이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정약용은 1808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제자들과 함께 학업에 정진하는 연구공간이자 방대한 저술이 탄생하는 곳이었다. 정약용의 제자 중에는 강진 읍내에서부터 수학한 제자들과 다산초당에서 만나 공부하기 시작한 제자(18제자)들이 있다. 정약용의 제자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정약용의 저술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 시기 정약용은 4서 6경에 대한 연구에 하였으며 1818년 해배되기 전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 연구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마쳤다. 《경세유표》·《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다. 해배 된 다음해인 1819년에는 《흠흠신서》 저술을 마쳤다. 


정약용은 문학적 성과도 매우 뛰어났다.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강진 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 주었다. 


1) 황사영 백서사건: 황사영이 1801년(순조 1)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A. de) 주교에게 보내고자 한 밀서

4. 정약용 선생의 해배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

18년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정약용은 저술의 수정보완을 계속했다. 한편, 소론계의 석천(石泉) 신작(申綽), 노론계의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과 같은 당대 석학들과 학문 교류를 했다. 


정약용은 자신의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학문적 자부심일 수도 있고, 훗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약용은 1836년 회혼일(回婚日)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의 삶을 돌아보면 한강을 꼭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강이 굴곡 많은 물줄기를 이어가며 큰 바다로 들어가듯, 정약용도 역경과 부침의 삶 속에서 ‘다산학’이라는 큰 산봉우리를 만들어냈다. 한강이 옥토를 적시며 백성들에게 물산을 제공했다면 정약용은 힘없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한강이 모든 계곡물과 시냇물을 품어내듯, 정약용도 자신을 해치고 모함하는 사람들까지 용서하고 껴안았다. 한강에서 유년과 노년을 보낸 정약용은 여러 물들을 아우르며 큰 바다로 나아가는 한강의 모습을 보며 학문의 방법을 깨쳤으리라. 정약용은 경세치용파와 이용후생파의 학문적 성과를 종합하고 다음시대를 이끌 큰 공부를 제시했다. 한강이 셀 수 없는 세월을 흘러왔고 또 그렇게 똑같이 흐를 것을 의심하지 않듯이 정약용 정신이 미래에도 이어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Jeong Yak-yong's Chronology
정약용의 일생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 문도文度

1762년(1세)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부 재원載遠과 모 해남 윤씨 사이의 제3남으로 출생하다

1765년(4세)

천자문을 읽기 시작하다 

1768년(7세)

시를 짓기 시작하여 10세 이전에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남기다

1776년(15세)

호조좌랑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라는 관명冠名을 얻다

1777년(16세)

이가환李家煥과 자형 이승훈李承薰을 쫒아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유고遺稿를 읽고 사숙하다

1783년(21세)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선정전宣政殿에서 정조의 지우를 입다

1784년(23세)

이벽과 함께 배를 타고 두미협을 내려가면서 서교西敎에 관하여 처음으로 듣다

1789년(27세)

대과에 급제하고 이어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다

겨울 주교舟橋의 규제規制를 작성하다

1792년(31세)

화성의 설계를 명받고 거중기擧重機를 설계하여 4만냥의 공사비를 절약하다

1794년(33세)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파주, 장단의 구악을 일소하다

1795년(34세)

7월 천주교도라는 무함이 있어서 그 지방의 천주교도를 회유하도록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외보外補되다

1797년(36세)

윤6월 곡산부사로 제수되다

전임 수령의 부정을 탄핵한 이계심李啓心이 부임하는 길목에 자수하였는데, 진상을 듣고 격려, 석방하였다. 

부임 후에는 민고民庫를 개혁하고 유형거游衡車를 제작하며 가좌부家坐簿를 정비하였다 

1800년(39세)

정조의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와 소천苕川에서 강학하며, 그곳에 여유당與猶堂의 편액을 달다

1801년(40세)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형 약전若銓은 흑산도, 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이배되다

1805년(44세)

백련사에서 혜장惠藏과 교유하다.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 옮기다

1808년(47세)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 윤단尹慱의 초당으로 이사하다 

1810년(48세)

큰아들 학연이 부친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해배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석방되지 못하다

1814년(53세)

죄인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어 석방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다

1816년(55세)

흑산도에서 형 약전이 사망하다

1818년(57세)

해배에 임하여 그는, 스스로 경영하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양반제자와 중인제자가 모두 참여하는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게 하고, 초의草衣 선사 등 불교 승려들은 전등계傳燈契를 조직하게 하여, 길이 우의를 다지도록 하다

9월

고향 마현馬峴으로 돌아오다

1822년(61세)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짓고 더 이상 저작에 마음 쓰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자연을 즐기다.

1836년(75세)

홍씨부인과의 회혼일에 마현에서 별세하다

1910년 7월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 문도공文度公이란 시호를 내리다 

널리배우고 많이 들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博學多聞曰文] 일을 처리함에 의에 맞는 것을 도度라고 한다[制事合義曰度] 

Chronology of Jeong Yak-yong's Writings

정약용의 저술 연보

1768년

7세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10세 이전에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남겼다고 한다 

1789년

주교사舟橋司의 규제規制를 지어 바치다

1791년

〈시경의詩經義〉800여조餘條를 지어 바치다

1792년

수원 성제城制의 규제와〈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바치다

1795년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攷》의 저술 명령을 받고, 이가환李家煥․이만수李晩秀․윤행임尹行恁 등과 함께 저술하다 

금정찰방으로 좌천 중에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저술하다

1797년

3월  이서구李書九․김조순金祖淳 등과 같이 《두시杜詩》 및 《춘추좌씨전》을 교정하다

윤6월  곡산부사로 부임하자 곧 아전들에게 조사시켜 《가좌부家坐簿》12권을 완성하고 부민의 재산상황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하다

겨울 《마과회통麻科會通》(12권)을 저술하다

1801년

장기에 유배되어 《이아술爾雅述》(6권),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 및 《백언시百諺詩》를 저술하다

1803년

《단궁잠오檀弓箴誤》를 저술하다

1804년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를 저술하다

《주역사전周易四箋》갑자본(8권)을 저술하다 

1805년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3권, 일명《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저술하다 

《승암문답僧菴問答》을 저술하다

1807년

여름 《상례사전喪禮四箋》(50권)을 완성하다

1808년

봄  거처를 다산초당으로 옮기다

《다산문답》 1권과 《다산제생증언茶山諸生贈言》을 쓰다

여름 〈가계家誡〉를 쓰다

겨울 《제례고정祭禮考定》과 《주역사전周易四箋》무진본(24권)을 완성하다

《역학서언易學緖言》(12권)을 완성하다

1809년

봄 《상례외편喪禮外篇》(12권)을 완성하다

가을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산록刪錄하고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3권을 붙이다

1810년

봄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관례작의冠禮酌儀》,《가례작의嘉禮酌儀》를 저술하다

가을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를 저술하다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을 저술하다

1811년

봄《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과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저술하다

1812년

봄《민보의民堡議》를 저술하다

겨울 《춘추고징春秋考徵》(12권)을 완성하다

1813년

겨울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40권)을 저술하다

1814년

여름 《맹자요의孟子要義》를 저술하다

가을 《대학공의大學公議》(3권),《중용자잠中庸自箴》(3권),《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를 저술하다

겨울 이학래李學來로 하여금 집주集注하게하여 《대동수경大東水經》(2권)을 완성하다 

1815년

봄 《심경밀험心經密驗》과 《소학지언小學枝言》을 저술하다

1816년

봄 이학래에게 받아쓰게 하여 《악서고존樂書孤存》(12권)을 완성하다

1818년

봄 《목민심서》(48권)을 완성하다

가을  해배되어 마현으로 귀향하다

1819년

여름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하다

겨울 《아언각비雅言覺非》(3권)을 저술하다

1821년

봄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를 저술하다

1822년

〈자찬묘지명〉을 짓다. 

정법삼집政法三集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여유당집》의편집에 착수하다. 경집 232권 과 문집267여권으로 총괄하다

1834년

봄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통합·증보하여《상서고훈尙書古訓》(21권)을 저술하다 

가을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10권)을 개정하다

1834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열수전서총목록洌水全書總目錄》에서는 경집 88책 250권, 문집 30책, 

87권 및 잡찬雜纂 64책 166권으로, 총계 182책 503권으로 정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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